주) 이 글은 2020년 아나키스트 도서관에 게재된 슈티르너 비평 「유일자도 밥을 먹어야 산다」(https://kr.theanarchistlibrary.org/library/anakiseuteu-yeondae-yuiljado-babeun-meogeoya-sanda)에 대한 반론이자, 슈티르너주의에 대한 하나의 변론이다. 필자 역시 슈티르너의 모든 주장과 결론을 옳거나 신성한 것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또한 『유일자와 그의 소유』와 슈티르너주의에 대한 평론 및 해설서인 『슈티르너 비평가들』이 정식 번역·출간된 현재, 원글의 저자 역시 당시와는 다른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따라서 이 글은 원글의 저자 개인에 대한 반박이라기보다, 해당 비평이 제기한 논점들에 대한 슈티르너주의자의 재비평으로 읽히기를 바란다.




의존은 복무가 아니다

"유일자도 밥을 먹어야 산다." 이 명제 자체에는 반박할 이유가 없다. 슈티르너주의가 육체, 식량, 노동, 기술, 사회적 인프라의 조건을 지워버린 순수한 관념론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지적은 유효하다. 유일자는 추상적 정신이 아니라 먹고, 자고, 아프고, 늙고, 돌봄을 필요로 하는 신체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에 놓인다. 인간이 타자와 관계 맺지 않고서는 살아가기 어렵다는 사실은, 개인이 조직이나 공동체 혹은 대의에 복무해야 한다는 결론을 자동으로 낳지는 않는다. 의존은 관계의 조건일 수는 있어도 주권 포기의 근거는 아니다. 에고이스트에게 함께함은 언제나 사용할 수 있는 힘이어야지, 자신을 넘어서 군림하는 새로운 신성한 이름이어서는 안 된다.

원글의 핵심은 단순히 "유일자도 밥을 먹어야 한다"는 데 있지 않다. 원글은 먼저 인간이 자신의 이익에 따라 대의와 공동체, 조직을 만들어내고, 때로는 그 대의에 복무하기를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로 코뮌과 조직 역시 망령이 아니라 에고이스트적 선택의 산물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지적은 일정 부분 타당하다. 에고이스트는 함께할 수 있고, 조직할 수 있으며, 필요하다면 어떤 대의에 협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쟁점은 선택의 가능성이 아니라, 그 선택이 언제까지 선택으로 남아 있을 수 있는가이다. 에고이스트가 어떤 관계를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만, 그 관계가 이후에도 계속 철회 가능하고 재협상 가능한 것으로 남아 있다는 보장은 아니다.

먼저 따져야 할 것은 "홀로 생존할 수 없다"는 말의 의미다. 이 문장은 얼핏 자명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러 층위가 뒤섞여 있다. 인간이 유아기와 노년기, 질병과 장애, 재난과 빈곤 속에서 타자에게 의존한다는 말과, 모든 인간이 언제나 특정한 공동체적 생산 체계에 참여해야만 한다는 말은 같지 않다. 또한 인간이 언어, 기술, 지식, 인프라의 축적 위에서 살아간다는 말과, 개인이 어떤 조직적 대의에 자기 개별성을 양도해야 한다는 말도 같지 않다. 전자는 생존 조건에 대한 서술이지만, 후자는 정치적 요구다. 따라서 "인간이 홀로 생존할 수 없다"는 문장은 그 자체로 결론이 아니라, 오히려 무엇을 의존이라 부를 것인지부터 다시 묻게 하는 출발점이어야 한다.

특히 "홀로 생산할 수 없다"거나 "홀로 번식할 수 없다"는 식의 표현은 인간의 생산성과 재생산의 능력으로 설명한다는 점에서 적절하지 못하다. 이러한 표현은 의도와 무관하게 비생산자, 비출산자, 장애인, 아동, 노인, 병자 같은 존재를 '불완전한 개인'의 자리에 놓을 수 있다. 물론 누구도 완전히 고립된 채 살아간다는 환상을 주장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인간의 상호의존성을 말하기 위해 생산과 번식을 인간 조건의 중심에 놓는 순간, 그 조건에 부합하지 않거나 부합하기를 거부하는 삶은 쉽게 예외나 결핍으로 취급된다. 유일자의 사유가 의미를 갖는 곳은 바로 그러한 예외의 자리다.

그렇다고 해서 함께함 자체가 부정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공동체나 조직의 존재가 아니라, 그것이 개인 위에 놓이는 방식이다. 인간이 서로의 힘을 빌리고, 기술과 지식, 노동의 축적을 이용하며, 필요에 따라 결합한다는 사실은 에고이즘과 충돌하지 않는다. 오히려 유일자는 자신에게 유리한 관계를 이용할 수 있고, 또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그 관계가 더 이상 나의 힘을 확장하는 수단이 아니라 나의 침묵, 희생, 복종을 요구하는 이름이 될 때, 그것은 연합이 아니라 권위가 된다. 상호의존은 복무의 근거가 아니라, 언제든 다시 협상되어야 할 관계의 조건일 뿐이다.

상호부조는 신성한 의무가 아니다

상호부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원글이 인용하는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은 상호부조를 개체의 도덕적 선택이 아니라 종의 생존을 위해 선택된 자연사적 경향성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이 설명은 서술이지 요청이 아니다. 어떤 성향이 진화적으로 선택되어 왔다는 사실은, 그 성향에 따라 지금의 개체가 특정한 관계에 계속 머물러야 한다는 결론을 낳지 않는다. 자연선택이 설명하는 것은 그 경향성이 왜 존재하고 왜 널리 퍼졌는가이지, 그것에 복무하지 않은 개체가 무엇을 잘못했는가가 아니다.

더 나아가 크로포트킨 자신의 논의를 따라가 보아도, 살아남은 협력은 대개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인 헌신이 아니라 조건적이고 상호적인 협력이다. 대가 없이 계속 손해를 감수하는 협력은 진화적으로 쉽게 도태되며, 지속되는 협력은 언제나 상대의 협력을 전제로 하고, 그 전제가 무너지면 철회되거나 재조정된다. 즉 상호부조가 진화적으로 안정적인 전략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무조건적인 복종이 아니라 바로 조건성과 철회 가능성을 내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고이스트가 요구하는 조건부 참여는 상호부조론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부조가 애초에 진화적으로 성립할 수 있었던 바로 그 구조와 같다.

그러므로 상호부조가 "자연스러운" 경향성이라는 서술은 그 자체로 특정 관계에 대한 복무를 정당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성향이 자연적이거나 본능적이라고 불리는 순간, 그것을 향한 의심은 더 쉽게 차단된다. "이것은 우리 안에 본래 있는 것이다"라는 말은 "이것은 신성한 대의다"라는 말과 다른 방식으로 같은 일을 할 수 있다. 개체가 왜 이 협력에 지금도 머무는지를 묻는 대신, 그것이 자연의 이름으로 이미 정당화되었다고 여기게 만드는 것이다. 상호부조는 유일자들이 서로를 사용할 수 있는 관계가 될 수도 있지만, 그 관계가 자연이라는 이름의 신성한 의무로 굳어지는 순간 다시 망령이 된다.

물론 개인이 자신의 이익과 욕망에 따라 어떤 대의에 협력하기를 선택할 수는 있다. 그 선택이 충분히 자율적이고, 언제든 재검토될 수 있으며, 더 이상 자신에게 유리하지 않을 때 철회될 수 있다면 그것은 에고이즘과 충돌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긴장이 발생한다. 자율적으로 선택한 관계도 반복되는 순간 의무처럼 굳어질 수 있고, 임시적인 협력도 조직의 언어 안에서는 충성으로 번역될 수 있다. 선택이 더 이상 철회될 수 없고, 불참이 배신으로 간주되며, 개인의 손실이 공동의 이름 아래 사소한 것으로 처리될 때, 그 관계는 더 이상 연합이 아니다. 그것은 유일자가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순간이 아니라, 다시 하나의 망령에 복무하게 되는 순간이다.

이 점을 확인한 뒤에야 원글이 제기하는 밥, 생산, 노동, 인프라, 공동체의 문제를 검토할 수 있다. 문제는 그것들을 말하는 것 자체가 아니다. 오히려 에고이즘이 이러한 물질적 조건을 외면할 때, 그것은 쉽게 추상적 자유의 언어로 퇴행한다. 그러나 물질적 조건을 인정한다는 것이 곧 조직적 의무나 공동체적 규율의 우위를 인정한다는 뜻은 아니다. 이후의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의제가 에고이스트에게 유용한가가 아니라, 그 의제가 언제 유일자의 힘을 확장하는 도구로 남고 언제 새로운 도덕적 명령으로 변하는가이다.

밥은 조직론을 제공하는가

가장 먼저 놓이는 것은 먹고 사는 문제다. 원글이 말하듯 유일자는 밥을 먹어야 한다. 그리고 현대 산업사회에서 그 밥은 단독자의 손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식량의 생산, 운송, 저장, 조리, 유통,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과 인프라는 수많은 타자의 노동과 지식에 의존한다. 이 사실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밥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은 특정한 생산체계에 자신을 귀속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사실은 누가 식량과 주거, 그리고 의료 및 기술 인프라를 장악하고 있는지, 누가 생존수단을 조건부로 배분하는지, 그리고 그 조건이 개인에게 어떤 복종을 요구하는지를 묻게 만든다.

따라서 에고이스트가 경계해야 할 것은 공동의 생산 그 자체가 아니라 생존수단의 독점이다. 시장이 임금노동을 통해 밥을 조건부로 배분할 때, 국가는 복지와 행정과 등록 체계를 통해 생존의 자격을 심사할 때, 조직은 대의와 충성을 통해 자원에 접근할 권리를 조절할 때, 모두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밥은 인간을 함께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간을 길들이는 가장 오래된 장치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유일자도 밥을 먹어야 산다"는 말은 공동체에 귀속되라는 명령이 아니라, 밥을 미끼로 한 모든 권위를 의심하라는 요청으로 읽혀야 한다.

"유일자도 밥을 먹어야 산다"는 명제는 그 자체로 아무런 조직론도 제공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 신체를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말할 뿐이다. 밥을 먹기 위해 타자의 노동, 기술, 운송, 저장, 조리, 돌봄, 지식의 축적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사실은 곧바로 코뮌, 조합, 조직, 대의, 혁명적 주체의 필요성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같은 사실로부터 우리는 전혀 다른 결론도 끌어낼 수 있다. 생존수단은 가능한 한 독점되지 않아야 하며, 먹고사는 조건은 특정한 집단에 대한 충성이나 복무와 결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다. 밥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공동체의 신성함을 증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밥을 배분하는 모든 권위가 얼마나 쉽게 인간을 복종시키는지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코뮌은 부정되어야 할 대상이라기보다, 언제나 조건부로 선택될 수 있는 관계 형식이다. 유일자는 자신의 생존과 쾌락, 힘을 위해 코뮌에 참여할 수 있고, 그 안에서 타자, 자원, 기술, 노동을 공유할 수 있다. 그러나 선택의 가능성은 언제나 탈퇴의 가능성을 포함해야 한다. 들어갈 수는 있지만 나올 수는 없다면, 그것은 연합이 아니라 규율이다. 중요한 것은 반反코뮌으로서의 에고이즘이 아니라, 탈신성화된 코뮌을 사용할 수 있는 에고이즘이다. 코뮌은 유일자의 힘을 확장하는 한에서 유용하며, 그 유용성이 사라지는 순간 더 이상 신성한 이름으로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

생산은 필요하지만 노동은 신성하지 않다

생산과 노동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유일자가 밥을 먹어야 한다면, 누군가는 먹을 것을 만들고, 옮기고, 보관하고, 조리해야 한다. 이 사실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생산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노동이 신성하다는 뜻이 아니며, 인간이 노동하는 존재로 정의되어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노동은 생존을 위한 수단일 수 있고, 때로는 쾌락이나 자기표현의 방식일 수도 있지만, 그 자체로 인간의 본질이나 윤리적 의무가 되지는 않는다. 에고이스트에게 중요한 것은 노동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생산을 어떻게 최소한의 복종과 최소한의 자기소모로 배치할 것인가이다.

따라서 여기서 쟁점이 되는 것은 생산의 필요가 아니라 노동의 신성화이다. 노동이 생존을 위한 수단이라는 사실은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수단이 어느 순간 인간의 가치, 공동체에 대한 자격, 혹은 해방의 윤리로 격상될 때 문제가 발생한다. 자본주의는 임금노동을 통해 "일하지 않는 자는 먹을 자격이 없다"고 말하고, 국가는 생산성과 납세와 복지 자격을 통해 인간을 심사하며, 때로는 혁명적 조직 역시 노동하는 주체를 새로운 인간의 표준으로 세운다. 그러나 에고이스트에게 노동은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사용의 대상이다. 노동은 필요할 때 이용되고, 가능하다면 줄어들어야 하며, 더 이상 나의 힘을 확장하지 못하고 나를 소모시키기만 한다면 거부될 수도 있어야 한다.

이는 노동 능력이 제한되어 있거나, 노동으로 자신을 증명할 수 없거나, 증명하기를 거부하는 이들을 위한 문제이기도 하다. 노동하지 않는 삶은 그 자체로 결핍이 아니다. 그것을 결핍으로 단정하는 순간, 인간의 가치는 다시 생산성과 기여도의 언어로 심사된다. 이 심사는 노동 약자들을 공동체의 주변으로 밀어내며, 결국 "누가 먹을 자격이 있는가", "누가 돌봄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 "누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인정될 수 있는가"를 판정하는 또 다른 권위를 호출한다. 에고이즘이 노동의 신성화를 거부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노동을 인간의 본질로 세우는 순간, 노동할 수 없거나 노동하지 않으려는 유일자는 다시 결핍된 존재로 분류된다.

나아가 노동할 수 없는 이들과 노동하지 않으려는 이들을 완전히 분리해서 생각할 수도 없다. 물론 질병, 장애, 돌봄, 노년, 빈곤처럼 노동 능력을 제한하는 조건과, 노동윤리 자체를 거부하는 선택은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노동을 인간의 자격으로 삼는 질서는 이 둘을 모두 의심의 대상으로 만든다. 노동할 수 없는 이는 무능한 자로, 노동하지 않으려는 이는 기생하려는 자로 분류된다. 이때 문제는 개인이 실제로 얼마나 생산하는가가 아니라, 생산하지 않는 삶을 설명하고, 변명하고, 증명하도록 강제하는 심문 구조다.

물론 노동 거부가 곧 타자의 노동을 무상으로 점유할 권리를 뜻하지는 않는다. 에고이스트가 노동을 거부할 수 있다는 말은, 다른 누군가가 그를 위해 당연히 노동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노동 거부는 생산물에 대한 무책임한 청구권이 아니라, 노동을 인간의 자격으로 삼는 질서에 대한 거부다. 나는 노동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선택이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어떤 대가와 협상 그리고 단절을 낳는지도 감수해야 한다. 문제는 그 협상이 도덕적 심판이나 공동체적 추방의 언어로 바뀌는 순간이다.

에고이스트에게 노동 거부는 언제나 가능한 선택지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것은 반드시 숭고한 저항일 필요도 없고, 정치적 선언일 필요도 없다. 단지 내가 나의 시간과 신체와 감각을 어떤 생산체계에 내어주지 않겠다는 결정일 수도 있다. 물론 그 결정에는 대가가 따를 수 있고,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다시 협상되어야 할 부분도 있다. 그러나 그 대가와 협상이 곧 도덕적 비난이나 공동체적 추방으로 바뀌어서는 안 된다. 유일자는 노동함으로써만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며, 노동하지 않음으로써 곧바로 결핍이나 죄의 자리에 놓이는 것도 아니다.

이 점에서 원글의 문제는 생산과 노동을 말한다는 데 있지 않다. 문제는 그것이 에고이즘을 물질적 조건 속으로 끌어내리려는 시도이면서도, 동시에 노동과 생산의 필요를 지나치게 빠르게 공동체적 의무의 언어로 번역한다는 데 있다. 유일자가 밥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 사실은 유일자가 생산하는 주체, 기여하는 주체, 코뮌에 복무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에고이즘은 밥과 노동, 생산을 둘러싼 모든 관계에서, 무엇이 나의 힘을 확장하고 무엇이 나를 특정한 역할에 고정하는지를 따져야 한다. 밥을 먹는다는 사실은 유일자를 공동체의 채무자로 만들지 않는다.

슈티르너주의는 반혁명적인가

이제 원글이 말하는 "혁명운동적 관점에서 슈티르너주의"로 돌아가 보자. 원글은 혁명운동을 "대중이 주도하는 실질적 사회혁명"과 "새로운 사회의 건설"로 정의하고, 이에 반하는 것을 반혁명이라 부른다. 그러나 여기에서 먼저 물어야 할 것은 슈티르너주의가 혁명에 얼마나 유용한가가 아니라, 왜 혁명이 유일자를 심사하는 기준이 되어야 하는가이다. 혁명은 하나의 가능한 순간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개인의 사유와 행위를 판정하는 최상위 기준이 되는 순간, 혁명은 더 이상 해방의 이름만을 갖지 않는다. 그것은 다시 하나의 대의가 되며, 그 대의에 충분히 복무하지 않은 자를 반혁명으로 명명하는 권위가 된다.

원글은 슈티르너주의가 대중을 신뢰하지 못한다고 비판하지만, 오히려 문제는 "대중"이라는 이름이 개별 유일자들을 얼마나 쉽게 덮어버릴 수 있는가에 있다. 대중은 실체 없는 허구가 아니다. 그러나 대중은 언제나 개별적인 몸들, 이해관계들, 두려움들, 욕망들, 회피들, 침묵들로 구성된다. 어떤 사람이 체제를 즉각 박차고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단지 비의지적이거나 기만된 존재라고 말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혁명운동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곧바로 반혁명적 존재가 되는 것도 아니다. 대중을 신뢰한다는 것은 대중을 하나의 혁명적 주체로 호출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자기 조건 속에서 다른 속도와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어야 한다.

물론 원글이 말하듯 국가, 자본, 도덕, 정의 같은 관념들은 단순한 머릿속 환상이 아니라 제도, 폭력, 임금, 법, 행정, 가족, 학교, 병원, 감옥의 형태로 물질화되어 있다. 그것들은 단순히 "망령을 떨쳐내자"라는 선언만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이 점에서 원글의 비판은 유효하다. 그러나 괴물이 실체를 가진다는 사실이, 그 괴물에 맞서기 위한 조직 또한 개인 위에 놓여야 한다는 결론을 낳지는 않는다. 국가와 자본이 물리적 장치라면, 그것에 맞서는 저항 역시 물질적 힘과 관계망을 필요로 할 수 있다. 문제는 조직의 필요가 아니라, 괴물과 싸운다는 명분 아래 또 다른 괴물을 만들어내는 순간이다. 괴물과 싸우기 위해 만든 조직이 불참을 배신으로, 이탈을 반동으로, 회의를 나약함으로 부르기 시작할 때, 그 조직 역시 괴물의 형식을 닮아간다.

또한 어떤 사유가 혁명 이후의 경제적 재조직 방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곧바로 반혁명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모든 사유가 코뮌, 조합, 국유화, 복지국가, 산업 통제 같은 사회 설계의 언어로 번역되어야만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유는 새로운 사회의 청사진을 제공하기보다, 그 청사진이 다시 개인 위에 군림하는 순간을 감지하게 만든다. 슈티르너주의가 갖는 유효성도 바로 이 지점에 있다. 그것은 혁명 이후의 생산양식을 완성된 도식으로 제안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생산양식도, 어떤 혁명적 조직도, 어떤 새로운 사회도 유일자 위에 놓이는 순간 다시 망령이 될 수 있음을 묻는다. 이 질문은 혁명운동의 외부에 있는 사변이 아니라, 혁명운동이 자신을 신성화하지 않기 위해 내부에 보존해야 할 불편한 감각이다.

조직운동 안의 에고이즘

이제 조합운동과 조직운동의 문제로 넘어갈 수 있다. 원글은 민주적이고 투쟁적이며 혁명적인 노동조합운동을 혁명운동의 유의미한 수단일 뿐 아니라 목적 그 자체라고 말한다. 여기서도 먼저 인정해야 할 것은 있다. 현대 산업사회에서 개별 노동자의 고립된 거부만으로 자본과 국가에 맞서기 어렵다는 지적은 타당하다. 파업은 조직될수록 강해지고, 노동의 중단은 개별적 항의가 아니라 집단적 정지로 나타날 때 더 큰 힘을 갖는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조합은 더욱 신성화되어서는 안 된다. 조합이 수단을 넘어 목적 그 자체가 되는 순간, 그것은 노동자의 힘을 조직하는 장치이면서 동시에 노동자를 특정한 운동의 규율 안에 묶는 이름이 될 수 있다.

조직은 강력하지만, 강력하다는 이유만으로 정당해지는 것은 아니다. 효과성은 정당성의 전부가 아니며, 조직된 파업이 개별자에게 강제되는 순간 그것은 또다른 권위주의로 작동할 수 있다. 물론 파업은 집단적 행위이고, 집단적 행위에는 일정한 조율과 약속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조율이 곧바로 모든 개인에게 동일한 희생을 요구할 권리로 바뀌어서는 안 된다. 누군가는 생계의 압박 때문에, 누군가는 신체적 혹은 정신적 조건 때문에, 누군가는 조직의 언어와 방식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파업에 참여하지 않을 수 있다. 이 불참을 곧바로 배신, 무임승차, 반동으로 명명하는 순간 조합은 자본과 싸우는 장치이면서도, 동시에 개인을 심문하는 또 하나의 권위가 된다.

물론 철회 가능성이 곧 아무 때나 아무 대가 없이 관계를 끊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총파업, 점거, 농성, 봉쇄처럼 위험과 비용을 함께 감수하는 투쟁에서 한 사람의 이탈은 다른 이들에게 즉각적인 물질적 손해를 남길 수 있다. 그러므로 에고이스트적 연합이 진지한 관계라면, 그것은 참여의 자유만이 아니라 이탈의 조건까지 미리 협상해야 한다. 누가 어떤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지, 어떤 상황에서 빠질 수 있는지, 이탈이 발생했을 때 남은 이들의 부담은 어떻게 나눌지, 체포, 임금 손실, 생활비, 돌봄 공백을 어떻게 보조할지에 대한 합의가 필요하다. 철회 가능성은 조직을 무력화하는 변덕이 아니라, 조직이 개인을 인질로 삼지 않도록 만드는 절차적 조건이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사전 협상은 철회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계약이 아니다. 오히려 철회가 언제나 파국이나 배신으로만 나타나지 않도록, 그 비용을 미리 가시화하는 장치에 가깝다. 어떤 행동에 참여한다는 것은 일정한 약속을 뜻하지만, 그 약속이 곧 개인을 끝까지 붙잡아둘 권리로 바뀌어서는 안 된다. 반대로 아무런 조율 없는 이탈 역시 다른 이들에게 비용을 전가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에고이스트적 연합에서 필요한 것은 무조건적인 구속도, 무책임한 이탈도 아니다. 필요한 것은 약속의 조건과 철회의 조건을 함께 드러내고, 그 조건이 더 이상 자신에게 유리하지 않거나 감당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다시 협상할 수 있는 구조다. 사전 협상은 자유를 폐기하는 계약이 아니라, 자유가 타자의 손실을 은폐하지 않도록 만드는 임시적 장치여야 한다.

이 말은 파업의 힘을 부정하자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파업이 강력한 수단이기 때문에, 그 힘이 내부의 개인들을 향해 어떻게 작동하는지도 함께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자본과 국가에 맞서는 과정에서 조합은 연대, 규율, 단결의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지만, 그 언어가 개인의 사정과 이탈 가능성을 지우는지 감시해야 한다. 에고이스트에게 조합은 사용할 수 있는 무기일 수 있다. 그러나 무기는 손에 들려 있어야지, 손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 조합은 노동자의 힘을 확장하는 한에서 유용하지만, 그 유용성이 충성의 요구로 바뀌는 순간 다시 신성한 이름이 된다.

물론 이러한 안전장치가 조직의 승리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강제성이 약한 조직은 때론 더 느리고, 더 불안정하며, 더 쉽게 분열할 수 있다. 국가와 자본처럼 이미 물질화된 권위에 맞설 때, 이것은 분명히 약점이 된다. 그러나 문제는 단순히 이기는가 지는가만이 아니다. 무엇을 포기하고 이기는가도 함께 물어야 한다. 조직이 내부의 비동의와 이탈 가능성을 제거함으로써 더 강해진다면, 그 조직은 더 효과적일 수는 있어도 덜 해방적일 수 있다. 에고이스트적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효과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효과성이 비지배를 완전히 집어삼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승리를 위해 모든 철회를 배신으로 만들고 모든 불참을 규율의 대상으로 만든다면, 그 승리는 이미 다른 형태의 지배를 품고 있다.

효과성은 정당성의 전부가 아니다

그렇다면 에고이스트적으로 선택된 조직을 다시 비판할 근거는 무엇인가. 대중이 각자의 이익과 욕망에 따라 조합과 조직, 집단을 선택했다면, 그것 역시 유일자들의 연합이 아닌가. 물론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관계가 에고이스트적으로 선택되었다는 사실은, 그 관계가 이후에도 계속 에고이스트적이라는 보증이 되지 않는다. 선택된 조직도 시간이 지나면 고유한 관성, 규율, 언어, 보존 욕망을 갖는다. 처음에는 개인들의 힘을 확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 어느 순간 조직 자신의 유지와 확대를 개인들에게 요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비판의 근거는 조직이 선택되었는가 아닌가에 있지 않다. 그 조직이 지금도 유일자의 힘을 확장하는가, 아니면 유일자를 조직의 지속을 위한 재료로 삼고 있는가에 있다. 에고이스트는 자신이 선택한 것이라고 해도, 그것이 자신 위에 올라서는 순간 다시 비판하고 파기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점에서 조합운동과 조직운동은 에고이즘과 반드시 충돌하지 않는다. 조합은 고립된 개인들이 각자의 힘을 모아 자본과 국가에 맞서는 유용한 장치일 수 있다. 노동자가 혼자서는 거부하기 어려운 명령을 함께 거부하고, 혼자서는 확보하기 어려운 자원과 시간을 함께 요구하며,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위험을 나누는 일은 충분히 에고이스트적일 수 있다. 그러나 조합은 조합원들의 힘을 모으는 장치일 때에만 유용하다. 조합원이 조합을 위해 존재하기 시작하는 순간, 관계는 전도된다. 조합의 보존이 개인의 욕망보다 우선하고, 조직의 방침이 각자의 판단보다 앞서며, 단결이라는 이름이 불참과 이탈을 심문하기 시작할 때, 조합은 더 이상 유일자들의 연합이 아니다. 그것은 노동자의 힘을 조직한다는 명분 아래 노동자를 다시 하나의 집단적 주체에 종속시키는 형식이 된다.

따라서 슈티르너주의가 조합운동과 조직운동에 기여할 수 없다는 식의 판단은 성급하다. 슈티르너주의는 조직의 효율적 운영 원리를 제공하지 못할 수도 있고, 총파업 이후의 산업 통제 방안을 세밀하게 설계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조직운동 안에서 다른 기능을 갖는다. 그것은 조직이 자신을 목적 그 자체로 착각하는 순간을 의심하게 만들고, 단결의 언어가 복종의 언어로 변하는 순간을 감지하게 하며, 조합원이 조합의 재료로 취급되는 순간을 거부하게 만든다. 조합운동에 필요한 것은 단지 더 강한 조직만이 아니다. 그 조직이 누구의 힘을 위해 존재하는지, 그리고 언제 그 힘을 빼앗기 시작하는지를 묻는 감각 역시 필요하다.

유일자라는 망령을 다시 묻기

이제 원글이 말하는 "유일자라는 망령"의 문제로 넘어갈 수 있다. 이 비판은 완전히 부당하지 않다. 만약 누군가가 유일자, 개별성, 독자성이라는 말을 하나의 순수한 인간상으로 세우고, 그것을 향해 자신과 타인을 심사한다면 그 역시 망령을 만들어낸 것이다. "나는 어떠한 대의로부터도 비롯하지 않는다"는 말이 다시 "나는 유일자로부터 비롯한다"는 교리로 굳어진다면, 그것은 슈티르너의 사유가 아니라 슈티르너라는 이름의 새로운 신앙에 가깝다. 그러나 이것은 유일자 개념의 폐기를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유일자는 고정된 이상향이라기보다, 모든 이상향이 나를 소유하려는 순간을 의심하게 만드는 이름이어야 한다.

원글은 물질적 인간에게 온전한 개별성을 확립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슈티르너주의가 반드시 아무 관계도, 아무 의존도, 아무 흔들림도 없는 순수한 개인을 전제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유일자는 고립된 원자가 아니다. 유일자는 관계 속에서 흔들리고, 타자에게 의존하고, 돈, 직업, 신체, 욕망에 좌우되는 바로 그 인간이 자신을 다시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운동에 가깝다. 그러므로 슈티르너가 가난했고, 사업에 실패했고, 관계 속에서 살았다는 사실은 유일자를 반박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유일자가 초월적 인간상이 아니라 물질적 조건 속에서 계속 실패하고 다시 자기화하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경험적 사실도 슈티르너주의를 반박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만약 슈티르너주의가 실제로 물질적 의존, 타자의 노동, 생존수단의 배분, 신체의 취약성을 전혀 사유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충분히 비판받아야 한다. 다만 슈티르너 개인의 가난, 사업 실패, 투옥은 그 자체로 유일자 개념의 반증이 되기 어렵다. 그것은 한 사상가가 물질적 조건에서 자유롭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 모든 대의와 권위가 개인을 소유하려는 순간을 의심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곧바로 무효화하지는 않는다. 슈티르너주의가 반박될 수 있다면, 그것은 슈티르너 개인이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유일자의 사유가 실제 관계 속에서 아무런 비판적 기능도 수행하지 못한다는 점이 드러날 때일 것이다.

따라서 유일자를 망령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은 유일자의 폐기가 아니라, 유일자 개념 자체의 탈신성화다. 유일자는 완성된 주체가 아니며, 조직 바깥에 순수하게 서 있는 인간도 아니다. 유일자는 국가, 자본, 가족, 노동, 혁명, 조합, 공동체, 심지어 슈티르너주의라는 이름까지도 나를 소유하려는 순간 그것을 의심하는 감각이다. 이 감각은 사회 변혁과 충돌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사회 변혁이 자기 자신을 새로운 성역으로 세우지 않기 위해 필요하다.

원글은 슈티르너주의가 현실의 물질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이 비판은 가볍지 않다. 에고이즘이 밥과 집세, 의료와 노동, 생산수단의 문제를 회피한다면, 그것은 쉽게 허공의 자유가 된다. 그러나 반대로 혁명운동이 밥과 집세, 생산의 문제를 이유로 개인의 이탈 가능성과 비협조 가능성을 삭제한다면, 그것 역시 해방의 이름을 한 관리체계가 된다. 물질적 조건을 말하는 것과 물질적 조건을 통해 개인을 규율하는 것은 다르다. 에고이즘은 전자를 거부할 필요가 없지만, 후자를 의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슈티르너주의는 혁명운동의 완성된 설계도가 될 수 없다는 말은 맞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슈티르너주의가 혁명운동에 아무 쓸모도 없다는 뜻은 아니다. 슈티르너주의는 무엇을 생산할 것인가, 산업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혁명 첫날의 밥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에 대해 충분한 답을 주지 못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질문을 던진다. 그 생산은 누구의 이름으로 조직되는가. 그 통제는 누구의 판단을 지우는가. 그 밥은 누구에게 어떤 자격을 요구하는가. 그 혁명은 누구를 반혁명으로 명명하는가. 그 공동체는 누구를 위해 존재한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누구를 재료로 삼는가.

이 감각은 추상적 태도로만 남아 있을 필요는 없다. 조직 안에서 그것은 구체적인 절차로 번역될 수 있다. 중대한 행동에 대한 사전 동의와 재동의, 소수 의견의 기록과 공개, 특정 안건에 대한 거부권, 위험 부담의 차등 배치, 탈퇴와 재가입의 절차, 불참자를 배신자로 낙인찍지 않는 규범, 돌봄과 생계 비용을 분담하는 기금, 조직 방침에 대한 주기적 재검토 같은 장치들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완성된 사회의 청사진은 아니지만, 조직이 스스로를 목적화하지 않도록 만드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에고이즘이 조직운동에 기여할 수 있다면, 바로 이러한 절차적 불신을 통해서다.

이 질문들은 혁명운동의 외부에서 던지는 냉소가 아니다. 오히려 혁명운동이 자신을 새로운 망령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필요한 내부의 균열이다. 조직은 필요할 수 있다. 코뮌도 필요할 수 있다. 조합도 필요할 수 있다. 생산, 분업, 인프라의 재조직도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필요하다는 사실은 신성함을 부여하지 않는다. 밥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이 밥을 배분하는 권위를 정당화하지 않듯, 혁명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혁명이라는 이름의 권위를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다시 한 번, 밥은 유일자를 소유해서는 안 된다

유일자도 밥을 먹어야 산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밥을 배분하는 권위가 누구를 길들이는지 물어야 한다. 유일자는 함께할 수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함께함이 언제 의무와 충성의 언어로 바뀌는지 감시해야 한다. 유일자는 조직할 수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조직이 누구의 힘을 모으고 누구의 이탈을 금지하는지 따져야 한다. 유일자는 혁명에 참여할 수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혁명이 누구를 해방의 주체로 부르고 누구를 반혁명으로 밀어내는지 의심해야 한다. 에고이즘이 지켜야 할 것은 고립된 개인의 환상이 아니라, 어떤 공동의 이름도 나의 주권 위에 군림하게 하지 못하는 감각이다. 그 감각이 없다면 우리는 왕과 법과 자본을 타도한 뒤에도, 다시 다른 이름으로 그것들을 세우게 될 것이다.